토마스 쉬날스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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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dit] 간단한 소개
제 이름은 토마스 P. 쉬날스키(Tomasz P. Szynalski)이고, 줄여서 톰이라고 부릅니다. 폴란드의 브로츠와프에 살고 있습니다. 브로크와프 기술 대학에서 경영학 석사를 취득했습니다. 1998년부터, 영어-폴란드 어 번역가, 영어 교사, 웹디자이너, 프로그래머로 일했습니다. 2000년에는, 미칼 리샤르트 보이칙과 함께 이 사이트를 만들었습니다.
[edit] 어떻게 영어를 공부했습니까?
[edit] 1. 초창기
영어 공부는 6살 때부터 시작했습니다. 8년 동안은 다른 사람들과 똑같은 방법으로 공부했습니다. 영어 수업을 들었죠. 효과는 형편없었습니다. 숙제를 비롯해서 선생님이 시키는 건 다 했습니다. 그러나 소득이 없었습니다. 최소한, 눈에 띌만한 결과는 없었습니다. 수업에서는 항상 상위권이었습니다. 그러나 여전히 영어로 된 글을 읽으려면 시간이 오래 걸렸고, 작문에는 실수가 많았으며, 발음은 나빴고, 말도 아주 느리게 했습니다. 8년의 희생이 아무것도 가져다주지 않았습니다.
상황이 좀 나아진 것은 컴퓨터 게임 덕분이었습니다. 아버지가 1991년에 컴퓨터를 사준 뒤로, 어드벤처 게임을 많이 했습니다. 특히, 루카스아츠에서 만든 인디애나 존스, 원숭이 섬의 비밀, 텐타클 최후의 날을 좋아했습니다. 게임을 하려면 영어 문장을 많이 읽어야 했고, 얼마 지나자 영어 문법에 대해 조금씩 감을 잡기 시작했습니다. 14살 때 영어 대회에 나가 좋은 성적을 거둔 것도, 영어 수업이 아닌 게임 덕분이란 걸 깨달았습니다. 많은 시간 동안 게임 속의 대화를 읽고 나니, 문법 시험을 볼 때 뭐가 답인지 감으로 느낄 수 있었습니다. 다른 애들은 문법 규칙을 기억해야 했겠죠. 그러나 여전히 제 영어 실력은 형편없었습니다.
[edit] 2. 동기 유발과 자기 주도적 학습
제가 영어를 진지하게 공부하게 된 것은, 자아를 계발하고 세상과 소통하는 것은 물론, 좋은 성적을 얻고, 보수가 높은 직업을 갖으려는 목적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처음에는 덜 건전한 동기가 있었습니다. 경쟁심이었죠.
1993년, 브로츠와프에서 가장 좋은 고등학교에 입학했습니다. 학교에서는 영어 수업이 많았고, 일부 수업(수학이나 물리)은 영어로 진행했습니다. 그곳에서 만난 선생님과 친구들로부터 많은 것을 배웠습니다. 고등학교 첫 2년이 제 영어에 특히 중요했습니다. 처음에는 별로 노력하지 않아도 될 것 같았습니다. 반편성 고사에서도 제일 높은 점수를 받았을 뿐만 아니라, 그동안 학교에 다니면서 영어는 항상 상위권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고등학교에서 보이텍 쥐에르자노브스키와 미칼 리샤르트 보이칙(안티문 공동 운영자)이라는 두 인상적인 학생을 만났습니다. 보이텍의 미국식 발음은 훌륭했고, 미칼의 영어에서는 실수를 찾을 수 없었습니다. 게다가, 그들은 만날 때마다 어휘가 점점 늘어나는 것 같았습니다.
그 친구들의 발전이 별로 탐탁지는 않았습니다. 솔직히, 싫었습니다. 다른 애들이 저보다 영어를 잘한다는 사실이 싫었습니다. 6살 때부터 영어 수업을 들어온 저보다 실력이 더 좋다니요. 용납할 수 없었습니다. 정말 심각하게 공부하지 않으면, 그들보다 뒤처질 것이 너무 분명했습니다.
당시 영어를 담당하던 야누슈 라스코쉬 선생님의 조언을 더 주의 깊게 듣기 시작했습니다. 좋은 영영 사전을 샀고, 사전에서 쓰는 발음기호를 공부했습니다. 집에서는 발음 연습을 하면서, full과 fool처럼 비슷한 단어들의 차이점을 구분하기 위해 노력했습니다. 발음은 점점 좋아져서, æ(cat의 모음), ə(away의 첫 모음으로 슈와라고 부르기도 함)도 잘 발음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폴란드에서는 영국식 발음이 실질적인 표준 영어 발음이지만, 보이텍과 미칼, 그리고 저는 미국식 발음을 공부하기로 했습니다. 일반인들과 다른 선택을 하는 것이 재밌기도 했고, TV나 영화에서 미국 영어를 쉽게 접할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오디오북(라스코쉬 선생님이 준 "Shaggy Dog Stories")을 들으면서 따라 하기도 했습니다. 매일 학교가 끝나면, 미국 방송을 봤습니다(CNN International, Cartoon Network). 시간이 흐를수록 구어체 영어에 적응해갔습니다. 직접 사용할만한 표현도 배울 수 있었습니다.
우리 학교는 특이하게도 미국 선생님이 몇 명 있었습니다. 전 이 기회를 최대한 활용하기로 했습니다. 수업 사이사이에 그분들에게 찾아가 일상적인 대화를 나누었습니다. 수업이 널널한 땐, 그분들과 45분씩 대화를 할 때도 있습니다. 그 시간에 다른 친구들은 서로 떠들고 있었지요. 영어로 말을 할 때는 간단한 문장을 사용하면서 실수를 피했습니다.
이렇게 서너 개월을 보내고 나니, 이제 입을 여는 것이 두렵지 않았습니다. 물론 여전히 딱 맞는 단어가 떠오르지 않는 때가 많았고, 가정이나 과거 완료, as if 구문은 한 번도 써보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글 쓰는 실력은 엉망이었지요(글을 쓰는 것은 말하기보다 더 높은 어휘력이 필요합니다). 비록 어린 아이처럼 들리기는 했어도, 큰 실수 없이 꽤 괜찮은 발음으로 기본적인 뜻은 전달할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때부터 영어 공부를 하는 동기가 바뀌었습니다. 경쟁심이 여전히 남아있기는 했지만, 저 자신이 발전하는 모습과 영어가 저에게 열어준 가능성을 즐기는 것이 주된 동기가 됐습니다. 미국인과 똑같이 발음을 하고, 새로 익힌 표현을 써보고, 외국 방송을 보면서 알아들을 수 있는 일이 정말 재미있었습니다.
[edit] 3. 읽기와 슈퍼메모로 향상된 영어 실력
고등학교 때 가장 중요했던 순간은, 보이텍과 미칼이 영어 공부에 사용하는 프로그램 이야기를 들었을 때입니다. 그 프로그램이 바로 슈퍼메모였습니다. "단어를 외우는 비법이 있을 줄 알았어."라고 생각했죠. "그래서 appalled나 streamline 같은 단어를 많이 알고 있었던 거야!" 너무도 당연하게 그들의 "비밀 병기"에 관심이 갔습니다. 그러나 의욕이 부족했습니다. 슈퍼메모를 사용하려면 단어, 발음 기호, 예문을 찾아서 입력해야 하는데, 시간이 오래 걸렸습니다. 프로그램을 사용해보기는 했지만, 꾸준하지는 못했습니다.
1994년 여름 방학부터 공상 과학이나 스릴러 소설 같은 책을 영어로 읽기 시작했습니다. 라스코쉬 선생님이 권유도 해주었고, 미칼과 보이텍도 영어책을 읽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새롭고 즐거운 경험이었습니다. 1년 전만 해도(막 고등학교에 1학년), 미국이나 영국 작가가 쓴 작품을 있는 그대로 읽을 수 있을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했었습니다. 제가 영어 소설을 즐겨 읽는다는 사실을 저희 부모님도 믿지 않았습니다.
책을 읽기 시작하면서, TV나 실제 대화를 통해 들었던 영어가 문어체 영어가 완전히 다르다는 것을 금방 발견했습니다. 작가들은 "wipe them frequently using a stubby gloved finger"나 "the final scurrying about had reached an almost unbearable frenzy" 같은 문장을 쓰고 있었습니다. 모르는 단어가 많았고, 단어를 외우기가 너무 어려웠습니다. 같은 단어를 여러 번 찾는 때도 있어서, 신경질이 났습니다. 새로운 단어를 확실히 외울 방법이 필요했습니다.
1995년 2월, 슈퍼메모로 영어 단어를 외우기 시작했습니다. 혁신적인 진전이었습니다. 책에서 찾은 많은 단어를 입력했습니다. 학교에서 돌아오면 컴퓨터 앞에 앉아서 한 시간이나 두 시간씩 새 단어를 묶음에 채워 넣었습니다. 슈퍼메모는 효과가 있어서, 오늘 30단어를 추가하면 한 달 뒤에도 그 30단어를 기억할 수 있다는 확신이 들었습니다. 마치 풀로 붙여놓은 것 마냥 단어가 머리에서 잊히지 않았습니다. 아주 많은 표현을 공부했고, 잊어버리는 것은 거의 없었습니다. 그렇게 제 지식은 줄어드는 법이 없이 계속 커갔습니다. 2년 후, 제 묶음엔 영어 단어 3,000개가 발음과 예문과 함께 정리되어 있었습니다. (슈퍼메모로 9년 동안 공부한 경험에 관한 글)
많은 독서량과 슈퍼메모 덕분에, 어휘는 저의 약점이 아니라 강점이 되었습니다. 이젠 (원어민이 아닌) 영어 선생님이 알려주는 단어 중엔 새로운 것이 없었습니다. 친구들은 질문이 생기면, 선생님 대신 저나 미칼을 찾아왔습니다. 심지어, 일부 선생님들이 우리를 시기하는 것도 눈치 챘습니다.
[edit] 4. 유창해진 말과 글
1995년 말, 인터넷을 사용하기 시작했습니다. 일주일에 두세 번, 수업이 끝나면 대학 화학 실에 있는 작은 컴퓨터 실에서 인터넷을 했습니다. 이메일 주소를 만들고 영어로 메일을 쓰기 시작했습니다. 실수없이, 어려운 단어로 복잡한 문장을 만드는 일에 푹 빠졌습니다. 하지만, 인터넷 초기에는 특별히 할 일이 없었습니다. 이메일 주소가 있는 친구들은 한 명도 없었습니다. 2년이 후 폴란드에 전화 모뎀이 보급되고 나서, 미칼을 설득해 서로 영어 메일을 주고받았습니다.
1997년쯤, 미칼과 저는 영어로만 대화하기로 했습니다. 수업 사이사이에 우리 둘은 영어로 대화하면서 수천 시간을 보냈고, 선생님이나 친구들은 우리를 신기하게 쳐다봤습니다. 영어로만 대화하는 것에 금방 익숙해져서, 예전에 폴란드 어로 이야기하던 때가 기억나지 않을 정도였습니다. 영어로 완전히 전환하는 데는 큰 용기가 있어야 했지만, 영어 대화는 당시에 제가 가장 필요한 것이기도 했습니다. 그땐 이미 어휘나 문법, 발음이 모두 어느 정도 수준이 있었습니다. 제가 필요한 건, 유창함이었습니다. 어떤 주제에 대해서도 주저 없이 영어로 말할 수 있는 능력이지요.
우리의 시도는 성공적이었습니다. 1998년, 고등학생을 대상으로 한, 유명한 전국 영어 대회에 참가했습니다. 모두 25,000명의 참가자 중에서 7등을 했습니다. 2년 뒤, 대학생을 대상으로 한 보다 작은 대회에서는 쉽게 우승할 수 있었습니다.
[edit] 요즘엔 어떻게 영어를 공부하고 있습니까?
이제 영어 공부는 저의 우선순위에서 벗어났습니다. 영어는 매일 사용해야 하는 일종의 도구가 되었습니다. "제2의 모국어"라고 할까요. 이메일의 90퍼센트 이상을 영어로 작성하고 있습니다. 자주 방문하는 웹사이트는 15-20개의 영어 사이트이고, 폴란드 사이트는 얼마 없습니다. 이젠 영어로 말을 하면서 사전을 찾지 않게 되었고, 미국인과 아주 비슷하게 말하고 있습니다. (때로는 미국인들마저 차이점을 느끼지 못하기도 합니다.)
[edit] 영어를 통해 무엇을 얻었습니까?
- 영어를 통해서 관심 있는 모든 분야에 대해 더 많은 것을 배울 수 있습니다. 프로그래밍 서적을 읽을 수 있습니다. 저명한 인사의 비디오 강의를 들을 수 있습니다. 사진에 관한 다큐멘터리를 볼 수 있습니다. 컴퓨터를 어떻게 고칠지, 건강은 어떻게 관리해야 할지, 휴가는 어디로 갈지, 어떤 물건을 살지 등에 대한 더 좋은 정보를 찾을 수 있습니다. 영어를 못하는 사람에게 인터넷이 얼마나 제한적일지를 생각하면 어이가 없습니다.
- 제 나라뿐만이 아니라, 세상 전체를 대상으로 글을 쓸 수 있습니다. 이곳과 토론 게시판에 제가 쓴 글은 세상 모든 사람에게 도움을 줄 수 있습니다.
- 고등교육을 받은 전 세계 모든 사람과 대화할 수 있습니다. 지금까지 저는 과학, 철학, 소프트웨어 개발 분야의 세계적인 전문가들과 의견을 주고받아왔습니다.
- 폴란드 어로는 경험할 수 없는 볼거리를 즐길 수 있습니다. Futurama, The Daily Show with Jon Stewart, The Office, Northern Exposure, YouTube 동영상, Reddit이나 The Onion같은 웹사이트도 즐길 수 있습니다. 같은 폴란드 친구들이 얼마나 많은 재미를 놓치고 있는지 안타까울 때가 많습니다.
- 영화를 보거나 게임을 할 때, 더 재미있습니다. 번역은 대개 정확하지 않고, 축약돼 있거나(시간과 공간의 제약 때문에), 존재하지 않을 때도 있습니다. 전문적으로 제작된 DVD조차 번역이 이상한 경우도 있습니다. 폴란드 어로 번역된 것을 어쩔 수 없이 보게 되면, 원본의 5-10퍼센트는 놓치고 있다는 사실이 안타깝습니다.
- 영어권 국가에 가서 편하게 의사소통 할 수 있습니다. 영국과 미국을 방문했을 때, 여러 번 원어민으로 오해받기도 했습니다. 정말 기분 좋았습니다!
- 영어로 수입도 생깁니다. 고등학교를 졸업한 다음, 컴퓨터 책 두 권을 번역했습니다(Using Windows 98, C Primer Plus). 현재는 번역 사업을 운영하고 있습니다.
1차 선교여행 (45~49년)
사도 바오로는 45~58년경 지중해 동부지역에서 세 차례 선교여행을 했는데, 사도행전 13~14장에 1차 선교여행기가 실려 있다. 바오로는 바르나바와 그의 사촌인 요한 마르코(사도 15, 37; 콜로 4, 10)와 함께 시리아의 안티오키아에서 출발하여 서쪽으로 32km 떨어진 셀레우키아 항구에서 배를 타고 바르나바의 고향인 키프로스 섬으로 건너가 동부 항구 살라미스와 서부 항구 파포스에서 선교했다.
다시 파포스 항에서 배를 타고 터키 남부 팜필리아 지방 페르게에 이르렀을 때 요한 마르코는 선교를 포기하고 예루살렘으로 돌아갔다(사도 13, 13).
바오로와 바르나바는 페르게에 도착해서 곧바로 안티타우루스 산맥을 넘어 피시디아의 안티오키아로 갔고, 이곳 회당에서 두 차례 안식일을 지내며 먼저 유다인들에게 선교했으나 배척당하자 이방인들을 상대로 선교했다.
바오로 일행은 유다인들의 방해로 피시디아의 안티오키아에서 이코니온으로 이동해야 했다. 그들은 이코니온에서도 유다교 회당에서 설교하는 기회가 생겨 복음을 전할 수 있었다.
하지만 유다인들이 돌을 던지며 죽이려 했기에 바오로와 바르나바는 리카오니아 지방의 리스트라와 데르베로 피해 복음을 전했다. 리스트라는 바오로가 2차 선교여행 때 제자로 삼은 티모테오의 고향이다(사도 16, 1~3).
바오로와 바르나바는 리스트라와 데르베에서 선교한 다음(사도 14, 20~21) 선교한 지역들을 차례차례 거슬러 가면서 보살핀 후 페르게에서 말씀을 전하고 서쪽으로 16km 떨어진 아탈리아 항구로 내려가 거기서 배를 타고 시리아 안티오키아로 귀환했다.
예루살렘 사도회의(49년)
49년에 예루살렘에서 그리스도교 역사상 최초의 공의회인 사도회의가 열렸다. 사도 바오로가 1차 선교여행을 한 후 많은 이방인들이 입교하는 결과를 낳았지만, 그로인해 그리스도 교회 안에 새로운 문제가 발생하였다.
교회는 이방계 그리스도인에게 신앙만 요구할 것인가, 아니면 유다교 율법 준수까지 요구하느냐는 문제에 대해 분명한 결정을 내리지 못한 상태였다.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예루살렘 모교회에서 사도회의가 열렸는데, 이 모임에는 예루살렘에서 활동하고 있던 본토 유다계 사도들과 이방인들에게 복음을 전하던 해외 유다계 사도들인 바오로와 바르나바가 참석했다.
‘예루살렘 사도회의’의 결정 사항이 바오로가 직접 쓴 갈라티아서 2장 1~10절과 루카가 기록한 사도행전 15장 7~20절에 전해오는데 세부적인 결정사항에서 조금 차이를 보인다.
갈라티아서 2장 1~10절에 따르면 예루살렘 사도회의는 두 가지 사항에 합의했다. 이방계 그리스도인들은 유다교의 율법을 지킬 의무가 없다는 것이요, 예루살렘에 거주하는 사도들은 유다인들에게 선교하고 바오로와 바르나바는 이방인들을 상대로 선교한다는 것이다. 두 가지 사항을 결정한 후 바오로와 바르나바는 예루살렘 모교회 신자들을 위해서 이방인들을 상대로 모금운동을 펴기로 약속했다.
이 사도회의의 결의로써 그리스도교는 유다교로부터 서서히 독립할 수 있는 기틀을 마련했던 것이다.
한편 사도행전 15장 1~2절에 따르면 예루살렘 모교회의 지도자 야고보는 유다인들과 이방인들로 이루어진 공동체가 서로 평화롭게 지내도록 지침을 내린다. 그 지침의 골자는 유다교를 거치지 않고 이방인들을 그리스도교에 영입하는 일을 근본적으로 인정하지만(사도 15, 19), 이방인들에게 유다계 그리스도인들이 혐오하는 우상에게 바쳐 더러워진 음식과, 불륜과 목 졸라 죽인 짐승의 고기와 피를 멀리 하라고 하는 것이었다(사도 15, 20).
곧, 이방인들이 할례 받을 필요는 없으나 율법의 몇 조항만은 지켜야 한다는 결정이었다. 여기 우상에게 바쳐 더러워진 음식은 신전에서 제사 지낸 다음 장터에 내다 파는 고기를 가리킨다.
불륜은 근친상간을 뜻하는데, 유다인들은 근친상간을 싫어했으나(레위 18, 6~20), 당시 지중해 지역 이방인들 중에는 근친끼리 결혼하는 경우가 자주 있었다. 그리고 목 졸라 죽인 짐승의 고기와 피는 유다인들에게 금기 식품이었다(레위 7, 26~27; 17, 10~14).
유다인들과 이방인들이 평화로운 공동체를 이루기 위해 유다인들은 하느님의 뜻에 따라 이방인들을 받아들이고, 이방인들은 형제애를 발휘해 유다인들이 싫어하는 일을 삼가달라는 지침이다. 원칙적으로는 하느님의 뜻을 따르되, 부수적으로는 이웃사랑과 양보의 미덕을 실천하라는 가르침이다.
〈원주교구 백운본당 주임〉
우리는 바오로의 다마스쿠스 사건을 개종이나 회개보다는 ‘소명’(召命), 곧 하느님의 부르심으로 표현해야 할 것이다. 왜냐하면 바오로가 그리스도교를 박해하는 박해자에서 그리스도교의 복음을 전하는 선교사가 된 것은 전적으로 하느님이 부르셔서 이루어진 일이기 때문이다.
바오로는 다마스쿠스 사건 후에 갈라티아 신자들에게 “형제여러분, 만일 내가 아직도 할례를 선포한다면 어찌하여 아직도 박해를 받겠습니까?”(5, 11)라고 묻고 “겉으로만 좋게 보이려고 한 자들, 그자들이 여러분에게 할례를 강요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오직 그리스도의 십자가 때문에 받는 박해를 면하려고 그리하는 것입니다”(6, 12)라고 단죄하였다.
‘할례’는 유다인들이 이방인들에 대하여 자신들의 민족적 특권을 지키기 위하여 요구했던 마지막 보루였는데 바오로는 다마스쿠스 사건을 통하여 할례의 무익함을 깨닫고 그것을 과감히 철폐함으로써 그리스도교를 유다교의 테두리에서 벗어나 인류 전체를 상대로 한 세계적인 종교로 탈바꿈시키는 기틀을 마련했던 것이다.
다마스쿠스 사건 이후의 행적
사도행전에 따르면 사도 바오로는 다마스쿠스 사건 이후 다마스쿠스 교회를 방문하여 하나니아스를 만나 세례를 받고(22, 16) 유다 회당을 다니며 복음을 선포했다고 한다(9, 20~22).
그후 바오로는 자신보다 먼저 사도가 된 이들을 찾아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지 않고 곧장 아라비아(오늘날의 요르단 왕국)로 떠나갔다가 다시 다마스쿠스로 돌아왔다(갈라 1, 16~17).
바오로가 아라비아로 간 목적은 분명하지 않으나 아마도 그곳 사람들에게 선교를 하러 갔을 것이다. 다마스쿠스로 돌아온 바오로는 그곳에 거주하던 아라비아의 아레타스 임금의 총독이 자신을 붙잡으려 하자 광주리에 담겨 성벽에 난 창문으로 내려져 극적으로 탈출에 성공한다(2코린 11, 32~ 33). 같은 내용이 사도행전 9장 23~ 25절에도 기록되어 있는데 거기에서는 유다인들이 바오로를 없애버리기로 공모하는 바람에 바구니에 실려 성벽에 난 구멍으로 탈출했다고 한다.
다마스쿠스에서 극적으로 탈출한 바오로는 예루살렘으로 상경해서 보름동안 케파와 야고보와 함께 지냈다(갈라 1, 18~19; 참조 사도 9, 26~31). 예루살렘 교회의 두 지도자인 케파와 야고보를 만난 후 바오로는 시리아와 킬리키아 지방으로 가서 한동안(36~ 44년)선교했다(갈라 1, 19~24; 참조 사도 9, 30; 11, 25).
한편 33년경 스테파노 부제 순교 후 일단의 그리스도인들은 박해를 피해 예루살렘에서 시리아의 수도 안티오키아로 도망쳐 그곳에서 유다인과 이방인들에게 선교하여 매우 좋은 성과를 얻었다.
그리하여 안티오키아에 최초로 유다인과 이방인이 함께 하는 혼성교회가 탄생했다. 예루살렘 사도들은 그 교회를 돌보기 위해서 키프로스 출신 바르나바(사도 4, 36~37)를 파견했는데, 바르나바는 타르수스에 머물고 있던 바오로를 데리고 안티오키아 교회로 가서 일 년 동안(44~45년) 안티오키아 교회를 돌보았다(사도 11, 19~26).
안티오키아 교회
시리아의 수도 안티오키아는 그리스도교 역사에서 매우 중요한 도시였다. 당시 로마 제국에는 인구 50만이 넘는 도시가 세 곳이 있었다. 제국의 수도 로마와 이집트의 알렉산드리아 그리고 시리아의 수도 안티오키아였다. 안티오키아 교회는 유다땅이 아닌 이방 지역에 세워진 그리스도교 최초의 교회로 유다인과 이방인이 함께 모인 혼성교회였다. 사도행전에 따르면 바오로가 세 차례에 걸쳐 지중해 동부 지역에서 선교여행을 할 때 언제나 안티오키아 교회를 출발지와 도착지로 삼았다고 한다(13, 1~5; 14, 21~28; 15, 30~41; 18, 18~23).
예수를 믿지 않는 안티오키아 시민들은 예수를 믿는 신자들에게 최초로 ‘그리스도인’이라는 명칭을 붙여주었다(사도 11, 26). 위대한 성인 이냐시우스가 제3대 안티오키아 주교로 재직하다가 110년경 로마 군인들의 호위를 받으며 안티오키아에서 로마로 압송되어 순교했다. 이냐시우스 주교는 로마로 끌려가던 중에 주변에 있는 여섯 교회, 곧 에페소, 막네시아, 트랄레스, 로마, 필라델피아, 스미르나교회와 스미르나의 주교 폴리카르푸스에게 편지 한 통씩을 써 보냈는데 이 편지들에는 세례, 성만찬, 교계제도와 같은 그리스도교의 기틀이 되는 매우 중요한 내용들이 실려있다.
유충희 신부〈원주교구 백운본당 주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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